2011/1/3(월)
서원  

여러분들은 서원 하면 무슨 생각이 나시나요? 아마 역사 시간에 배운 도산서원이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정도 아닐까요? 서원은 조선의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역사나 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빼고는 서원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서원은 한 물 간 것처럼 보이는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많은 유산입니다. 예를 들어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 같은 서원은 한국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물입니다.

도산서원 전경. 처음에 퇴계 이황이 서당으로 세웠던 것을 후일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며 서원으로 확장하였다.

국립대학 성균관, 국립지방학교 향교, 사립지방학교 서원

서원은 한국인의 건축관(觀)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드높은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선비 정신 역시 우리가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유산입니다. 지금껏 유교는 잘못 이해되어 왔거나 너무 깎여서 평가된 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 선비정신은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정신입니다. 이번에는 서원과 관련해서 이 서원에 깃든 선비들의 정신 세계를 보았으면 합니다.

서원의 성격을 성균관이나 향교와 비교해보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균관이 국립대학이고 향교가 국립지방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지방학교(대학)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서원은 국립교육기관과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서원이 생기게 된 배경도 국립학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조선 중기의 위대한 실학자였던 유형원은 서원의 발생을 향교의 교육이 잘못된 데에서 찾았습니다. 즉 성균관이나 향교가 과거에만 집착하고 명예나 이익만을 다투게 되어 뜻있는 선비들이 그 대안을 찾으려고 만든 게 서원이라는 것이지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을 닦고 후진들을 교육하기 위해 서원을 만든 겁니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에 중앙정치에 진출한 사림의 선비들이 중앙의 정치꾼(훈구파)들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서원이 생겨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림파들은 성리학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시키려 했지만 현실 정치에 막혀 무자비한 사화를 겪으면서 낙향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때 지방에 만든 것이 서원으로 그들은 여기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재기를 노리면서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원이 일종의 후방 기지 같은 역할을 한 것이죠.

후학들이 스승을 기리는 서원을 세워

그런데 성균관에서도 보았지만 유교식의 교육에는 반드시 선현들에 대한 제사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서원에도 사당이 있는데 그 전체 구조는 향교와 같습니다. 공부하는 강당이 가운데에 있고 기숙사는 강당 양쪽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사당은 강당 뒤에 있는데 이런 구조가 여느 향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서원은 자기들이 표본으로 하고 싶은 스승을 모셔야 하니 이 스승의 연고지에 세우게 됩니다. 이 점과 관련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 스승이 생존 시에 자신을 모시고 있는 서원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산서원의 경우 퇴계가 살아 있을 때 그가 후학들을 가르치려고 이 서원을 세웠다는 것이 그것인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선비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을 모시는 사당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퇴계가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산서원에 가면 도산서당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 서당은 퇴계가 직접 만든 것으로 퇴계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서원은 그가 타계한 후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나중에 확장공사를 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서당은 퇴계가 만든 것이지만 나머지 꽤 많은 건물들은 거의 나중에 생긴 것들입니다. 또 다른 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고 하는 소수서원입니다. 이 고장(순흥)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소개한 안향의 고장입니다. 이곳이 안향의 중요한 연고지이기 때문에 그를 기리는 서원을 세운 것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강당 내부 모습(왼쪽)과 단아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죽림서원(오른쪽)의 모습.

 

이렇게 학문의 연마를 위해 생겨난 서원에는 후에 폐단이 생겨납니다. 한 사람의 스승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세력 확장을 위한 근거지로 서원이 이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인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서원의 숫자만 증가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조선 후기가 되면 서원의 수가 600개가 넘게 되고 심지어는 같은 스승을 10여 개의 서원에서 동시에 모시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파벌 싸움은 더 심해갔고 서원 근처에 사는 백성들 역시 많은 피해를 보게 되어 결국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원이 이때에 없어집니다.

서원에서 보이는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

이런 서원의 역사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서원에서 보이는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입니다. 우선 아래 왼쪽 사진에 나오는 건물을 보십시오. 이 건물은 소수서원의 학생 기숙사 건물입니다. 소수서원은 영주에서 부석사를 가다 보면 부석사 조금 못 미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항상 이 두 유적을 같이 답사합니다. 소수서원이 어떤 서원입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왕실로부터 막강한 지원을 받은 서원입니다. 이렇게 지원을 받으면 정부로부터 땅이라든가 노비를 대량으로 받기 때문에 재정이 아주 탄탄해집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어떻습니까?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아무 치장도 없습니다. 튼튼한 재정으로 얼마든지 크고 호화롭게 지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히 검박하고 단출합니다. 이게 바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선비의 정신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비들의 청빈한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소수사원의 기숙사(왼쪽)와 선비들이 삶의 자세를 상징하는 배롱나무(오른쪽)의 모습.

 

그래서 서원들의 건물들은 이와 같이 질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비들은 이런 것에 개의하지 않습니다. 선비들의 이런 고결한 정신을 보여주는 사물이 또 있습니다. 서원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가 있습니다. 꽃이 백일 동안 붉다고 해서 이름이 백일홍 나무로 불리는 나무입니다. 배롱나무라고도 하지요. 왜 이 나무를 서원에 심는 것일까요? 이 나무는 껍질이 아주 얇아 마치 없는 것 같습니다. 속이 다 비치는 것 같습니다. 옛 선비들은 이 나무의 모습처럼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니 겉과 속이 다를 수 없습니다. 속으로 딴 마음 품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삿된 생각도 하지 않고 투명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제자가 공자에게 [시경]에 흐르는 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공자는 ‘사무사(思無邪)’, 즉 ‘어떤 사악한 생각도 안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배롱나무는 바로 공자의 이 선비 정신을 보여줍니다.

유교는 원래 이렇게 높은 정신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고결한 정신을 가진 유교도를 만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유교의 이런 정신이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등을 방문하셔서 유교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특히 병산서원은 풍광이 아주 뛰어나니 꼭 답사하기를 권합니다.

 

아름다운 풍광이 일품인 병산서원. 경북 안동 소재.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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