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10(금)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노래한 도가 철학자들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의 중고등 학생,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열심히 일한 후 땀을 닦는 근로자들의 모습, 화사하게 피어난 꽃, 가을날의 낙엽 등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 없는가? ‘아름답다’는 감정은 다양한 경로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이 ‘본연 그대로의 모습’에 가까이 있는 무언가를 대할 때 흔히 느끼게 되는 감정인 것은 분명하다. ‘~답다’는 것. 이는 인위적인 왜곡을 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노래한 도가 철학자들이 바라본 ‘자연스러움’이란, 우리가 말하는 그것과 차원이 조금 다르다. 궁금하지 않은가?


옛날 노나라에 나무를 깎아 북틀을 만드는 기술이 실로 신기에 가까운 한 목수가 있었다. 임금이 대체 어떤 기술로 북틀을 만드는지 물어보자, 그는 별다른 기술은 없고, 단지 며칠 동안 몸과 마음을 재계하여 공명심과 옹졸함, 정교함에 대한 집착,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 잊게 되었을 때, 나무를 만지기 시작한다고 대답했다. 모든 잡념이 사라진 마음의 평온 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나무의 결’을 볼 수 있으며, 바로 그 결에 따라 악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마치 제사를 앞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구도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심재(心齋)다. 이는 내 마음을 비워내고 비워내어 비본질적 외피를 벗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윽고 모든 것을 잊은 좌망(坐忘) 속에서, 나와 나 이외의 것을 구분 짓는 경계는 허물어져 물아양망(物我兩忘)에 이른다. 텅 비었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며, 감각 기관이 아닌 기의 운행으로 대상과 소통할 수 있는 허심(虛心)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스런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도(道)뿐 아니라, 만물에 내재한 동일한 도에 다가갈 수 있다.


『장자』 ‘외편’에는 노나라 임금이 갑자기 날아온 한 바다새를 맞이하여 풍악과 진수성찬이 있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었으나, 그 새는 도리어 마음의 병을 얻어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는 우화가 나온다. 새는 새의 방식으로 살아야지, 인간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 인간사만 보더라도 제 입장만 고집함으로써 수시로 논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옳음에 대한 변화는 무궁하고, 그름에 대한 변화도 무궁하다. 나무는 잘려서 책상이 되지만, 책상의 입장에서는 탄생이지 않은가? 도의 관점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는데, 옳고 그름이란 스스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마치 원의 중심을 잡는 것처럼 운동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무궁한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 이러한 도추(道樞)는 차이를 인정하는 도의 관점이다. 신기하게도 각자 자신의 본성을 따르지만, 조화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만물에 통하는 도는 결국 ‘하나’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18장에는 대도가 무너지고 나서 인의가 생겨나고, 지혜, 혹은 지식이 있은 뒤에 큰 거짓이 나타났다는 구절이 있다. 마찬가지로 충신이란 국가가 혼란해졌을 때, 효도란 육친이 화목하지 못할 때 부각되는 개념들이다. 장자의 경우 노자와 맥락은 비슷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공맹과 달랐다. ‘사회의 안정’은 자연스런 본성을 따른 때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여야 하는데, 그는 인의예지를 강조하다 결과가 오히려 목적이 되어 버리는 사태를 경계했던 것이다.

유학과 도가의 차이는 이처럼 자명하다. 공자의 사상이 위학(僞學, 학문을 위한다)이라면, 노장의 사상은 위도(僞道, 도를 위한다)다. 전자가 배움, 도덕성을 추구하는 데 반해, 후자는 자연성을 추구한다. 실로,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즉 유학의 ‘학문’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가의 ‘도’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자연(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함’이다. 그것은 모임과 흩어짐, 삶과 죽음, 끝과 시작처럼 끊임없이 대립하고 변화하는 유동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알맞은 형태로 평형을 이룬 상태이기도 하다.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가하지 않고[무위(無爲)]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둠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무불위(無不爲)] 다시 말해, 자연은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자유로움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자연스러움을 발현하는 길은 사실 어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물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수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지럽게 변화하는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물물자(物物者, 사물을 존재하고 움직이게 하는 근원)’와 하나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이란 사회가 덧씌운 비본질적인 것, 인위적인 모든 것을 덜어낸 본연의 모습일 따름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도를 인지하지 못함에도, 언제나 그러한 도를 향해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만물에 깃든 ‘도’의 자연스런 속성이므로.
Written by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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